나는 오늘도 엄마를 죽였다 - I killed my mother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 정신과, 유길상 전문의]
모든 사람이 완벽한 부모의 역할을 학습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자녀를 양육하는 기본적 방식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부모들은 출산, 양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이를 훌륭히 해낸다. 하지만 일부 부모는 이를 고통스러워하고 자녀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아이에게 부모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완벽한 신이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환경에서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맑은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엄마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엄마의 상실 혹은 부재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이는 엄마를 통해 안전감을 느끼면 세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바닥을 기고, 소파를 오르고 손에 집히는 모든 물건을 만지고 맛보면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 독립을 준비한다.
<자비에 돌란>이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제목이 무척이나 자극적이다 못해 패륜적이다. 어떻게 나를 낳은 엄마를 죽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심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후베르트>의 엄마는 이혼 후 홀로 자녀를 키운다. 엄마와 <후베르트>와의 관계는 파국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엄마는 아들을 학교로 데려가는 차 안이나,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본인의 의견만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아들의 말은 엄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약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경멸한다. 아들은 이런 엄마의 태도에 분노한다. 그리고 <후베르트>는 엄마와의 관계가 보통의 가정과는 왜 다른지 의문을 품는다.
<후베르트>는 늪과 같은 엄마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기에 독립을 응원한다면서 동시에 교묘하게 엄마 곁을 떠나는 아들을 방해한다. 차 안에서 다툰 후, 당장 차 밖으로 나가라고 말을 하며 차 문을 잠가버리고, 아들이 친구와 독립을 위해 아파트를 얻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다가 바로 취소해 버린다. 그리고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숙학교라는 엄마의 테두리 안에 가둬 통제를 시도한다. 엄마는 아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후베르트>는 반대로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후베르트>는 기숙학교를 무단이탈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공간으로 퇴행하여 다정했던 엄마를 소환한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의 내용은 제목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런 엄마-자녀 간의 갈등은 정신과를 찾는 환자군 중에서는 드물지 않다. 엄마는 자녀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태도는 대단히 이중적이고 변덕스럽다. 이런 병적인 엄마가 의지할 대상이라곤 약자인 자녀밖에 없다.
<후베르트>가 엄마에게 만약 오늘 자신이 죽으면 어찌할 것이냐고 물으니 내일 죽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엄마를 벗어난 환경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엄마 곁에서 머물며 평생 봉사하고 노력하라고 세뇌시킨다. 자녀들은 나를 낳고 키워준 엄마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무감과 엄마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며 분노하고 무기력해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엄마와의 비정상적인 연결감 때문에 고통스러워 정신과를 찾는 많은 환자들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치료에 실패한다. <후베르트>는 고뇌하다 결국 엄마와 행복했던 원시 상태로 퇴행하여 엄마에게 돌아간다. 환자들 또한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와 부적절한 연결감을 유지하며 고통 속에서 견디기를 선택한다.
세상은 엄마를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수많은 <후베르트>들은 오늘도 엄마가 죽는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