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부모님의 지나친 기대로 힘듭니다

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수능을 본 재수생입니다. 작년에 공부를 별로 안 했는데 운 좋게 수능은 제 성적보다 잘 나왔고, 그래도 더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서 재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제 공부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받은 점수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막판에는 불안감에 집중도 잘 안 됐습니다. 

수능은 제 실력 정도 본 것 같고, 크게 잘 보지도,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고, 조금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제 성적을 보고 마치 제가 문제아인 것처럼 대합니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제가 주말에 학원 일정이 없어서 낮잠을 자거나 쉬면 수험생이 그렇게 많이 자도 되냐고 잔소리를 하고, 제가 철이 없어서 뭘 모른다며 주변 지인이 학벌 때문에 애인과 헤어진 이야기, 좋은 대학에 못 가면 무시당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전에는 직업 다큐멘터리를 보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냐면서 졸지에 그 사람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너무 짜증이 나지만 부모님은 당연하다는 듯 말합니다. 제가 “좋은 대학 가면 많은 것이 보장되는 것은 맞지만, 너무 과하게 그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하면 아니라면서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항상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데 정말 제가 너무 어린애인 걸까요? 대학이 좋아야 행복하다는 식으로 자꾸 조건부 행복을 저에게 강요하는 느낌입니다.

수험 생활할 때 저는 너무 힘들면 플랜 B를 세우며 저를 위로하곤 했는데, 부모님 생각에는 재수도 했으니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상상은 아예 없는 모양입니다. 

 

꼭 제가 수험생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도 부모님은 어느 대학, 무슨 직업인지부터 이야기합니다. 제가 왜 호구 조사하듯 그런 이야기만 하냐고 하면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게 당연하다고 합니다. 제가 기대에 못 미치면 계속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무한 반복합니다. 저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끊임없이 제 노력을 비하합니다. “너도 노력했겠지만 너보다 잘하는 사람은 더 노력한다.”라는 식으로요. 

부모님이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할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평소 잠을 잘 자는 편이고 수험생활 중에 울다 밤샌 적은 없는데 그날은 정말 너무 스트레스 받아 울며 밤샜습니다. 잘못하면 수능이 끝없이 망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떨며 수능을 봤습니다. 

가채점 후 저는 안도했는데 가족들은 한숨에 심각한 표정만 지어서 저도 그냥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올해 중 우울감이 제일 크게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학벌주의에 대한 세뇌를 받아서 이제는 대학에 가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식이라도 “못해도 괜찮다.”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학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부모님 지원에 감사한 마음도 들지 않고 이런 제가 철이 없고 부정적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이 싫어지는데 당장은 자취할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는 건 좋은 대학을 간 후가 아닌가 싶은데 적어도 일 년은 걸릴 텐데 고민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사연 잘 읽었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열심히 수능을 준비하시느라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수능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많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수험생 분들이 사연자님의 상황에 공감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단 수능이 아니라도 우리는 살면서 부모님의 지나친 기대로 심적 압박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모두 자녀인 나를 사랑해서 하는 걱정이며 관심이라고 하지만,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모님이 원하는 틀에 맞추기를 바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부모님께 서운하기도 하고 원망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왠지 부모님께 죄인이 된 것 같고 부족한 자식이 된 것 같아 우울함과 무기력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아마 사연자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감정들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나치게 학벌에 대해 강요받으며 부모님이 정해 놓은 기준에 따르기를 요구받다 보면 ‘진짜 자아’가 위축될 수 있습니다. 원래 본인이 가진 기질이나 욕구,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부모님이 원하고 기대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다 보면 ‘가짜 자아’가 내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자아와 가짜 자아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마음의 혼란과 갈등은 커지게 됩니다. 사연자님 역시 삶의 주인공이 사연자님이 아닌 부모님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 내면의 갈등과 혼란스러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다행히 사연자님께서는 부모님이 지나치게 학벌 중심적 사고를 갖고 있으며, 학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수능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의 플랜 B를 세워 놓고, 학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부모님께 전달하는 노력을 하신 것 역시 사연자님이 가진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과,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연자님을 어린애 취급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흔들리며 본인이 정말 아직 철부지라서 그런 것일까 하는 고민을 남겨 주신 것일 테지요. 

 

내 의견과 생각에 더 확신을 갖고 내 주관대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아직 길을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생각이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는 부모님이 사연자님보다 삶의 경험이 많으시고, 누구보다도 사연자님을 위하는 분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도 깔려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처럼 좋은 학교에 가면 더 많은 기회나 이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분을 사연자님도 알고 계시기에 부모님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수능 결과와 대학 입시뿐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사연자님의 삶을 바라보았을 때 삶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부분을 더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대학 입시에 국한된 문제로 보이지만 앞으로 성인으로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살아야 할 사연자님이 부모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대학 입시 이후에는 진로, 결혼 등 다양한 삶의 과제들을 마주하게 될 텐데 그런 선택의 과정에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주체적인 존재로서 본인의 삶을 개척해야 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어쩌면 대학 입시라는 선택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 그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담감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평생 사연자님을 뒷바라지해 주시고 정성으로 키워 주신 부모님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불효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효’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선택을 위탁하고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유아기, 청소년기를 지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성인기에는 부모님보다 자신이 선택의 주체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민하고 계시는 대학 선택과 관련해서는, 현실적으로 성적도 고려하셔야겠지만 어떤 전공을 선택해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원하는 진로를 위한 발판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연자님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더라도 사연자님이 원하는 진로의 방향과 맞지 않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과를 성적에 맞춰서 선택하게 된다면 대학 진학 이후에도 본인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을 방황하거나 우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이 평소 관심 있던 분야나 해 보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선택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전공이나 학교가 사연자님과 일치한다면 그 길을 선택하면 좋겠지만, 만약 차이가 있다면 사연자님이 원하시는 곳에 대한 이유와 그 이후 진로를 그려 보는 과정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부모님과 말씀 나누시면서 설득하는 과정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사연자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학벌 중심적 사고를 갖고 살아오신 부모님이 한순간에 쉽게 변하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바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연자님을 전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로 사연자님이 원하는 길을 찾아가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 부모님이 사연자님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께 사연자님의 인생에 대한 포부나 부모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해도 한 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님께서는 사연자님을 누구보다 위하기 때문에 걱정되는 마음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학벌에 대해 더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방식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사연자님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 그 자체는 진실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하다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사연자님께는 사연자님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있음을 부모님께 충분히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일 수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면 때로는 현명하게 회피하고 시간을 두는 것이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선택해 준 길을 따라가는 인생을 살다가 예기치 못한 실패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는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지금보다 더 크게 들 수도 있습니다. 실패나 좌절을 겪지 않는다고 해도 내 삶을 내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공허함을 삶의 어느 시점에서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내 삶에서의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내가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인으로서 사연자님이 삶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사연자님에게 동의하거나 지지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흔들림 없이 본인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사연자님이 충분히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 갈 힘이 있다고 충분히 믿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든든한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언젠가 부모님도 변화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 선택뿐만 아니라 앞으로 삶의 중요한 결정에서도 부모님이 아닌 사연자님이 선택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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