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운더리에 따른 역기능적 관계 유형 ① _ 억제형

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떤 관계에서 안정감과 친밀감을 느끼시나요? 누군가에게는 그 대상이 친구나 연인, 부모님이나 배우자 혹은 직장 동료나 같은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있을 때, 깊은 친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꼭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위로와 휴식 같은 시간이 되어 줍니다. 반면에,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불편하거나 사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굳이 사람들과 친분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테고요. 

이처럼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경계를 세우고, 누군가가 선을 넘어온다 싶으면 경계심을 곤두세우며 불쾌감이나 부담감을 크게 느끼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또 어떤 분들은 단 몇 번 만난 사람에게도 큰 호감을 표하며 성급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으며,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분들이 관계를 맺는 데도 더 적극적이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타고난 기질 자체가 사람보다 사물에 더 관심이 많다거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가 충전되는 내향적인 분들은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까지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성향 외에도 어린 시절, 애착 손상으로 인해 자아 발달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즉, 어릴 때 애착 대상과 맺었던 유형화된 관계 방식의 틀에 갇히면서 비슷한 관계 양상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역기능적 관계의 고착화’라고 합니다.

그중 자아와 애착 대상 간에 미분화된 유형은 관계에 몰두하고, 과분화된 유형은 자기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기질에 따라 억제형이나 탈억제형의 역기능적 교류 방식이 나타날 수 있는데, 내향형인 경우 억제형으로, 외향형의 경우 탈억제형으로 고착되는 양상이 좀 더 두드러집니다.

억제형(inhibited type)’의 아이들은 애착 손상에 대한 거절과 좌절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억제형의 아이들은 내향적이거나 예민한 성격의 기질을 타고난 경우가 많으며, 애착 손상이 생기면서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이들의 불안감과 민감성이 증폭되는 양상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회피하는 접근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억제형 중에서도 자아가 미분화된 유형은 순응형, 자아가 과분화되는 유형은 보통 방어형의 관계 패턴을 보이기 쉽습니다. 먼저, 순응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과도하게 신경 쓰고, 거절에 대한 민감도가 높습니다. 또 타인 중심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하기보다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는 편이죠. 이들의 가장 큰 심리적 취약성은 대상항상성이 잘 발달하지 못해 감정 조절 능력이 미약하고, 불안을 스스로 처리하기 힘들어하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지면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유독 힘들어하고, 상대에게 자신을 맞춰서라도 하나가 된 듯한 안도감을 느끼며 불안감을 해소하려 하죠. 그러나 이러한 역기능적 관계 패턴이 굳어지게 되면, 자기 내면에 집중하거나 자기 감정이나 생각, 취향 등 자기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해 나가기가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순응형에 해당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게 맞춰져 있는 무게의 중심을 자기 내면으로 좀 더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우선시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 활동, 즉 나의 욕구나 생각, 감정 등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이렇게 함으로써 좀 더 자기를 존중하고, 점차 자기주장 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지는 정도까지 목표로 해서 바꿔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며, 비록 갈등이 생겨도 서로 대화나 협상, 양보 등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다음으로 방어형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데 몰두합니다. 이들은 사람들과 친밀함을 느끼기 전에 위협감을 먼저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다가오면 일단 마음속으로 ‘스톱(stop)!’을 외치며 상대의 저의부터 살피곤 하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거리 두기’가 일상화되던 지난 몇 년간, 불필요한 관계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돼서 심리적으로 편안하다고 느끼셨던 분이라면, 방어형의 관계 유형에 해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방어형의 깊은 내면에는 애정에 대한 결핍감과 외로움이라는 쓸쓸하고도 차디찬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가감과 연결보다는 고립을 선택한 이들은 겉으로는 꽤 독립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좀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높은 긴장감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를 방어하는 심리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 양상은 타인에 대한 냉담함이나 관심과 공감 능력의 부족 등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방어형이 느끼는 내면의 외로움이 달래지거나 애정 욕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고독해지고 메말라 가는 관계 패턴이 고착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런 분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사람들 간에 따뜻한 체온을 나눌 만큼 좀 더 가벼운 외투로 갈아입기 위해,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무겁기만 할 뿐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도는 그런 갑옷을, 혹시 여러분도 입고 계시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산과 들에 봄기운이 완연한 지금이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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