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보다 감정을 돌봐야 할 시간 - ‘주지화’라는 방어기제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주변을 둘러보면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유형의 이성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서 어떤 연애 기술을 써먹어야 할지 이론적으로는 빠삭하게 알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연애 카운슬러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본인은 연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이른바 ‘연애 고수’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도 하죠. 

그러나 막상 현실의 연애에서는 상대 이성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감정적인 소통과 교감에 서툰 모습을 보입니다. 이론상으로는 전문가, 실전에서는 아마추어인 것이죠. 연애를 경험과 감정이 아니라, 이론과 머리로만 배운 데 대한 혹독한 대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겉으로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떠한 인생의 파고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것만 같습니다. 일면 정신적으로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 부럽기도 하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하고 차가운 느낌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참 이성적이야.” 또는 “우리 아이는 너무 감성적이야.”처럼 그 사람이 이성적인 편인지 혹은 감정적인 편인지 양극단으로 나누어 판단하곤 합니다. 또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고, 더 우세하게 발달된 사람인지 생각해 보곤 하죠. 

때때로 어떤 사람이 대화 중에 몹시 흥분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매우 ‘감정적’이고 ‘미성숙’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반면,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에 비해 좀 더 성숙하고,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물론, 매사에 자신의 감정만을 우선시하며 사람들을 대하거나, 일적인 영역에서까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감정적인 동물입니다. 그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이성’을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말이죠. 그러나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확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감정적’ 혹은 ‘감성적’인 성향을 ‘이성적’ 혹은 ‘합리적’인 성향보다 하찮게 보는 경향성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감정을 잘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는 반증인 셈이죠.

사실,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중에는 이성이 지나치게 발달하거나 매사에 과도하게 분석적 또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평소와 같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는 별 문제없이 잘 지내십니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유독 더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들의 이성적인 특성이 강하게 발휘되기 때문이죠.

이런 분들은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이 대체 왜 발생한 것인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미처 실수하거나 놓친 부분은 없는지 등등.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만 골몰할 뿐, 정작 힘들어하는 자신의 마음, 즉 감정적인 부분을 돌보는 일은 등한시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나치게 이성적인 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가 ‘주지화(intellectualization)’입니다. 주지화란, 감정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이러한 주지화는 감정적인 갈등이 감지되거나 불안이 올라올 때, 충동적인 욕구나 감정을 억누르며, 지적인 이해나 언어적인 설명을 통해 해소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른 방어기제들이 그렇듯이, 주지화 역시 적절히 작동되고 사용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라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인식되지도 소화되지도 못한 감정들이 어느 순간 분출되듯이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차가워 보이던 사람이 당혹스러운 순간에 처하면 무척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동안 매번 자신의 감정은 방치한 채 머리와 이성에만 기대어 지내 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저편으로 밀려나 소외된 감정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감정들이 당신의 진짜 욕구였다고, 솔직한 마음이었다고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잠시, 복잡한 생각과 논리는 접어 두고, 인간적인 시선과 마음으로 접근해 보면 의외로 쉽게 상대가 이해되거나 문제가 풀렸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도 혹시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차가운 머리도 있지만, 따뜻한 가슴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를 인간적이게 하는 특성임을 기억하신다면 좋겠습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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