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본질은 악플이 아니다 - 이제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신의학신문 : 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설리 씨가 떠난 후의 풍경은 슬프게도 최진실 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와 유사하다. 악플로 고통받던 유명 스타와, 악플이 그들을 어떻게 괴롭혔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최진실 씨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08년. 11년이 지났다. 악플러들이 달라지지 않은 만큼, 우리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11년 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레 악플에 대한 비판 또한 사그라들어갔다.

악플들은 분명 두 사람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많은 경우 악플들은 인신 공격성이고, 당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심리적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악플러들에게만 화살을 돌리는 것이 설리 씨에게 위안이 될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플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건강하게 극복되지 못한 스트레스가 잘못된 방법, 잘못된 통로로 분출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 또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5년간,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다 (유일하게 2위를 기록한 것은 2017년, 리투아니아가 OECD에 새롭게 가입한 해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의 평생 정신 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10% 미만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설리 씨를 사후에 페미니스트 전사로 추켜세우는 것이, 나는 사실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설리 씨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들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이 시점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신건강은 늘 열린 공간에서 나눌만한 대화 소재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정신 질병에 대한 낙인(stigma)이 심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낙인이 심할수록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음에도,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치료를 받지 않게 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즉, 정신과적 치료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바로 낙인이다.

낙인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가지는 편견이다. 낙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하는데, 공공에 의한 낙인(public stigma), 내재화된 낙인(internalized stigma), 그리고 사회구조적 낙인(structural stigma)이 그것이다. 공공에 의한 낙인은 우리가 특정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편견/차별이다. 가령,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나약하다’, ‘멘탈이 약하다’라는 편견이 그 예이다. 내재화된 낙인은 그러한 공공의 편견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체화하는 것이다. 즉, 그 편견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자존감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난 나약해’, '난 정신질환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 마지막으로 사회구조적인 낙인은 사회에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에 대해 불이익을 주는 제도적 장치들을 말한다(가령, 정신질환 때문에 보험 회사에서 보험 가입을 거부한다든가, 취업 시 불이익을 주는 경우).

실제로, 미국 내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이 심한 소수민족들의 정신건강 관련 치료를 받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낙인이 덜한 백인들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다. 이 차이는 사회경제적 수준을 감안하여 비교해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낙인이 더욱 심하고, 결과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가장 덜 받는 경향성이 있다.

 


정신질환은 나약함이 아니다.

미국 내에도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젊은 층을 시작으로 변화의 물결이 일었고, 지금은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편하게 심리/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에는 많은 연예인들, 유명인들이 스스로의 정신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올림픽 수영 스타 마이크 펠프스는 가장 잘 알려진 정신건강 홍보대사로, 스스로 경험한 우울증 이야기와 자살 생각에 대해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나 케이트 스페이드, 앤소니 보데인 같은 유명인들의 자살도 정신건강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진시켰다.

뉴욕에서 정신과 레지던트 생활을 했던 3년 내내, 나는 거의 매주 상담을 받아왔다. 레지던트 생활은 (한국만큼은 아니겠지만) 힘든 기간이었고, 여기서는 상담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요새 미국 레지던트들의 번아웃 도 매우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병원들에서 레지던트들을 대상으로 상담 비용을 절감해주어서 더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다들 그만큼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의대생이었을 때는, 훨씬 더 우울하고 힘들 때도 정신과의 문턱은 한없이 높아만 보였던 것 같다.

육아와 긴 출퇴근 시간으로 상담받을 짬을 못 내던 내게 동기가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너 정신과 의사잖아. 너한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야 이건.”

결국,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해소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우리가 정신건강에 대해 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용기를 내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정신적 어려움이 나만 경험한 것이 아니고, 다들 겪지만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 첫걸음일 것이다. 정신질환이 나약함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 시작점이다. 악플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설리 씨의 죽음을 계기로 악플에서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 대한 보다 깊은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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