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당신께 전하는 식물 이야기 14 - 실패한 마음(식물)을 다시 담는 일

 

내 마음에서만 유독 소화되지 않는 마음이 있다. 예를 들어, '효도' 라든가, '가족의 화목'이라든가 또는 '사랑받고 자란 아이' 등의 마음들은 내가 어떤 글을 쓰려면 깊은 한숨을 쉬고, 그 이전에 명상도 두어 번 하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했지만, 실패했던 마음들이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위와 같은 마음들을 소화해 보려던 시도의 실패가 잔뜩 나부라져 있다.

'무조건의 사랑'이라는 말은 참 숭고한 가치가 새겨진 말이다. 내가 어떤 조건도 없이 누군가를 하나부터 열까지 무조건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연예인도 유명인도 아닌데, 항상 (어떠한) 딸, 즉 앞에 수식어가 붙었다. 주로 (듬직한) 딸이었다. 붙은 이상 그에 상응해야 했다.

본디 무조건적으로 받은 사랑이 하나 없으니, 조건적으로 사랑을 받기 위해 나는 언제나 처절하게 분투했어야 했다. 언제나 나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고,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나 이거이거 했어."라고 말했고, 엄마는 그날 기분에 따라 칭찬의 정도가 달랐지만, 그런대로 대꾸를 해 주곤 했다. 엄마 아빠가 일 나간 사이, 밥을 챙겨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줄 대상이 부재해 한껏 외롭곤 했다.

 

내 첫사랑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살아갔다. 그것이 어떤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른 채 아주 어른 아이가 나를 품어 낳은 엄마를 이해하려 부단히 매일 노력했다. 그랬기에 부당한 이유로 회초리로 종아리를 수십 대 맞아도, 너무 아파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어야 했다. 나는 그게 엄마가 엄마의 화를, 풀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화를 풀어야 개운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시, 다시, 또 다시 일어섰다.

보름을 긴 바지나 흰색 긴 양말 면스타킹을 신고 유치원에 다녔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도 아이의 종아리가 두 배나 부어 있는 일을 간섭할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저 '가족 문제'라고 여겼던 시대였다.

나는 엄마가 웃으면 웃고, 어느 날에 엄마가 울고 있으면 "왜 울어?" 하며 함께 울었다. 그러다 진정이 되면, 내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약을 바르는데 내가 이를 악물며 소리내지 않으려고 참으면 그제야 엄마는 쓸데없고도 잔인한 말을 건네곤 했다.

"이래도 엄마가 좋니?"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끄덕거렸다. 그 순간이 내 불안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엽은 두 여자의 시간. 꼭 서로와 자신을 가엽이 여기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나에게 있었다.

나의 첫 사랑은 처절히 실패했다. 종아리는 뺨으로 바뀌었고, 뺨에서 몸에서 몸을 치기 시작했고, 머리를 뜯기도 했으며, 어떤 유형의 것들로 양산되어 갔다. 몸집이 내가 훨씬 더 커지고서는 정서적으로 변했다. 가족 내 외톨이로 만들기도 하고, 아주 차가운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칼로 나를 베는 것같이 아팠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물리적으로 맞는 게 훨씬 나았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본 일이 극히 적은 내가 시간이 지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나는 거친 나의 사랑을 아주 거칠게 표현했다. 매우 다듬어진 모양새로 나를 소중히 다루어 주던 그 사람을 보며, 질투가 났다. 곱고 고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자라나는구나. 영화 보러 가는 날 10분 늦어도 나는 날이 서고 화를 조절할 수가 없었고, 그 사람은 앞부분은 광고가 대부분이니 늦어도 나머지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나는 태평스러운 소리나 하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 달랐다.

나는 그의 소중하고 고운 마음을 받을 준비가, 자격이 되지 않았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때 그렇게 만났으니 나에게는 소중한 온기가 되어 지금껏 살게 하였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난 그 시간 동안에는 알 필요 없던 상처와 거친 마음을 알게 되었겠지만, 나는 이유와 조건 없이 나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온전히 아껴주는 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안전지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여기 우리 둘이 있을 땐 안전해, 누구도 너에게 소리 지르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아. 억지로 너의 감정에 무엇도 강제로 요구하지 않아. 너는 그냥 '너'이기만 하면 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굳어 있던 몸을 추스르고 세상의 유연함과 나와 세상과의 거리 등을 재어 볼 수 있었다. 해리포터가 계단 칸 서랍에서 살다가 편지를 받아 본 날, 그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나라로 떠나갈 수 있게 된 사람처럼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나는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그저 '나'이기만 해도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를 처음 느끼게 되었다.

 

매일 죽을 것 같던, 함께 울고, 내가 위로해 주고, 흐릿하게 짐작하는 내 것 아닌 그 슬픔에 울다 잠드는 그런 날들이 지나가고 그런 엄마로부터, 나의 첫사랑으로부터 어쩌면 크게 실패하고, 나는 나를 무한히 사랑해 주는 사람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기타 생존에 필요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리석게도 집에서 나오기 전에 본가에서 로즈마리를 키우며 추위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추울 것 같아.' 하며 실내 적응 연습도 없이 따뜻한 거실로 데리고 들어온 것처럼, 그러다 초록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나 혼자 배신감을 느끼고 오히려 '흥'한 것처럼.

나의 초보 식집사 시절에는 로즈마리를 키우며 로즈마리보다 '로즈마리를 키우고 있는 나'에 취해 있던 어리석음이 가득했던 시절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나는 그렇게 제멋에 취했고, 나중에도 키울 수 없었던 것은 적응해서 데리고 들어와도 낮에는 해를 받아야 하는데, (들였다 내놨다를 반복해 줄 만큼) 내가 그만큼 부지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안다고.

받아 보지 않으면 누가 베풀지 못한다고 하는가, 나에게도 많은 시련과 실패가 있었지만, 그러함에 비웃음도, 주변에서의 만류도 있었지만,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실패한 마음이 있었다고 좌절하여 반쪽짜리로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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