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대하는 자세

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지난해 가을, 가슴 아픈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10.29 참사인데요. 안타까운 젊은 청춘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건들 때문에 충격을 받고 많이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정부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 힘든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대상으로 치료비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문의하셔서 필요하다면 꼭 빨리 치료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힘든 사건을 겪었을 때 어떤 식으로 힘든 사건들을 대처해 나가야 될 것인지 트라우마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트라우마를 겪은 후 꼭 기억해야 될 첫 번째 원칙은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나면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부 환경에 노출되는 것을 힘들어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 등을 많이 두려워하거든요.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집에만 있게 되면 계속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 그런 장면과 생각에 반복 노출되는 결과를 낳게 되거든요. 

그래서 증상이 더욱 악화되고 더 심한 PTSD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라건대 원래 회사에 다니시는 분들은 가능하면 빨리 회사로 복귀하셔서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불편하거나 힘들 수는 있겠지만 일상의 루틴을 유지해 나가면서 주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계속 받게 되고, 그러면서 그 생각과 감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주위가 분산되기 시작하거든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생각에 자꾸 꽂혀 있는 인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거죠. 

다음으로 일상을 좁히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정서적인 부분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불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혹은 충동적으로 위험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과 감정에 계속 갇혀 있기보다는 회사가 끝난 시간 혹은 주말에 가능하면 계속 사람들과 만나려 하고, 그래서 사람과 접촉하며 외부 환경에 나를 반복해서 노출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생기는 질병 중 하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재경험, 계속 반복해서 트라우마를 유발한 장면 혹은 관련된 이미지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 증상입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듯이 그런 이미지와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나의 주의 집중을 내 머리 안으로 두는 것이 아니고 외부 환경이나 주위를 분산할 수 있는 혹은 몰두할 만한 거리를 계속 만들어서 나를 외부에 노출시킬 수 있도록 환경을 설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다음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마음 털어놓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혹은 내 이야기를 잘 받아 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런 분들을 앞에 놓고 나의 마음을 끄집어내서 얘기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감정에 묻어 있는 먼지들이 털어져 나오고, 한편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의미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사건의 의미가 뒤섞이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과정은 트라우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없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뇌는 대부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사건이나 경험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한참 전에 겪었던 힘든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과정은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가 바뀌는 과정, 예전에는 끔찍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나서는 끔찍했지만 나는 거기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잘 견뎠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 트라우마가 극복된 거라고 얘기할 수도 있거든요.

의미가 바뀌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뒤섞여야 되고, 그런 뒤섞인 의미가 다시 머릿속에 저장되고, 저장된 기억들을 내가 말을 통해서 밖으로 배출하고, 또다시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이것이 뒤섞이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대부분 PTSD를 겪고 계시는 분이나 심한 트라우마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사건을 입 밖으로 내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물론 이것들을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것은 트라우마를 부추기는 일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런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 자체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가 내 생활을 많이 방해하고, 트라우마의 후유증이 생각보다 길게 간다고 느끼신다면, 꼭 가까 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셔서 도움이 되는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트라우마가 얼마간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많지만, 어떤 경우에는 트라우마가 더 심해져서 PTSD라는 병이 되기도 하고요. 나아가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여러 가지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작은 트라우마로부터 시작해서 더 큰 병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내 삶이 망가지고, 삶에 제약이 많이 생기게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 삶이 삐걱거린다고 느끼기 시작하신다면 최대한 빨리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셔서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트라우마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침들을 알려드렸습니다. 현재 여러 가지 트라 우마로 인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신재현 원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