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가정 폭력을 당한 적이 없는데, 부모님이 증오스러워요

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희 집은 평범합니다. 일반적인 가정이고 경제적으로 별로 부족한 편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가부장적인 면이 있고 약간 욱하는 게 있으세요. 자기만 재밌고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농담을 좀 많이 해요. 한 번 화를 내면 집안 분위기가 많이 냉랭해져요. 보수적이고 엄하신데 엄하실 때는 솔직히 무서워요. 속으로는 ‘한 귀로 듣고 흘리자. 아무것도 아니다. 또 저러네.’라고 생각하고 욕도 하지만 더 크게 화낼까 봐 많이 불안하고 긴장하게 되더라고요.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는데 정말 열심히 하세요. 새벽 5시에 나가서 저녁 6~7시에 들어오세요. 일도 힘든 거라 집에 오시면 매일 텔레비전만 보세요. 가족끼리 보여서 놀 때 대부분은 피곤하다고 같이 하지 않아요. 전 이 부분은 이해해요. 정말 힘든 일인 걸 아니까요.

어머니는 많이 무관심하세요.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너도 이제 클 만큼 컸잖아.”라고 말하면서 자꾸 주부, 엄마로서의 역할을 안 하더라고요. 그리고 정치 방송에 빠진 후부터 더욱 그래요.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말이 따뜻한 편이에요.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고, 주말에만 집에 와요. 다섯 살 차이 나는 남동생도 하나 있어요. 여기까지는 가족 소개입니다.

사람이 집에 오면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껴야 하잖아요? 전 혼자 있으면 그래요. 편안하고 자유로운 느낌도 들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면 너무 불안하고 답답하고 긴장돼요. 그리고 부모님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아니꼽게 보여요. 다 한심해 보이고, 짜증 나고, 빨리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고, 경멸하고, 증오스럽기도 해요.

두 분은 정말 깡패 같아요. 아버지는 담배를 밖에서 피면 제 방으로 들어오는데 계속 그래요.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웃으면서 자꾸 장난치면서 침대에 누워요. 싫은 농담을 웃으면서 받아주는 척하는 게 너무 싫은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제가 여기서 짜증 내거나 소리치거나 화내면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요. 되도록이면 표면적이라도 평화를 유지하고 싶거든요.

 

제가 이렇게 부모님을 증오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제가 희망 고등학교를 지원하고 떨어지는 과정과 그 후부터예요. 전 전국에서 가장 좋은 과학 고등학교에 지원했고 1차에서는 붙었지만 2차에서 떨어졌어요. 워낙 수준이 높은 곳이라 예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결과를 마주하고 나니까 너무 슬프고 비참하더라고요. 

결과가 나온 날에 쭈뼛거리면서 어머니한테 불합격했다고 말했는데 “그럼 기대했어?”라고 말하더라고요.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 어.”라는 식으로 넘겼고, 나머지 가족들한테도 불합격했다고 덤덤하게 말했고 반응도 “그래.”였어요. 그래서 숨어서 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며칠 동안 엄청 울었어요.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그리고 얼마 뒤에 아버지가 제 불합격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서 장난을 쳤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까지도 전 너무 속상해 있던 터라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까 언니가 그런 장난치지 말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끝났어요. 저는 학업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자살을 실행할 생각을 한 적도 있고, 두 번 정도 옥상에 올라갔을 정도로 우울하고 많이 불행했어요.

어느 정도 슬픔이 조금 옅어지고 여운이 남았을 때 너무 미련이 남아서 입시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다른 학부모님들이 단 댓글들은 정말 따뜻했어요. 경쟁자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자기 자식 응원하듯이 응원해 주셨어요. 학생이 직접 카페에 가입해서 혼자 준비하는 게 정말 대견하다고요. 그리고 저는 그 글들을 보면서 저희 부모님이 얼마나 형편없고 부족한 부모인지 깨달았어요. 

자기들이 못했다고 저도 못할 거라 단정 짓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고. 교육에 관심도 없어요. 물론 있긴 하죠. 그런데 진짜 자식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할 뿐이죠.

이제는 저한테 잘해 주거나 사랑을 주는 듯한 행동이나 말을 보이면 저는 그저 다 사랑하는 척, 연기처럼 보여요. 어쩔 때는 저한테 주는 호의와 좋은 말, 행동들이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줬어요. 하지만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또 이상한 농담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열더라고요. 그때마다 ‘봐, 나를 또 속였어. 사랑하는 척 계속 속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잡고 싶지 않아요. 대화로 풀고 서로 이해하고 눈물겨운 화해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너무 행복하지 않아요. 왜 자기 파괴적인 것 같죠? 기분 탓인가요? 하루 종일 우울하거나 슬프진 않지만, 전보다 행복을 못 느끼겠어요. 진짜 어딘가가 썩어 버린 것 같아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마치 토해 내듯 적어 주신 기나긴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부모님을 향한 원망감과 소통의 부재와 관련된 고민이 깊어 보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현재 청소년 시기, 그중에서도 고등학생 신분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이 시기는 그동안의 성장과 발달을 바탕으로 점차 사람과 세상에 대한 폭넓은 경험과 교류를 넓혀 나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어릴 적과 달리, 나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좀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시각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온 우주 같은 존재입니다. 아직 내면적으로도 또 신체적으로도 약한 존재이기에 양육자로부터 애정과 보호, 관심을 받으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렇듯 어린아이에게 부모라는 존재의 영향력은 지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내 우주를 채우는 것들에 점차 변화가 생깁니다. 친한 친구나 다른 소중한 것들이 내 우주의 부분들을 조금씩 채우게 되는 거죠. 우리의 몸이 자라나는 만큼 생각과 시야도 더욱 넓어지게 되고, 관계를 맺는 대상도 확장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연자님처럼 나의 부모와 친구의 부모 혹은 커뮤니티상에서 온라인으로 만나게 된 부모 등과의 비교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나의 부모를 새롭게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만약 내가 평소 부모님께 아쉬웠던 점이나 바랐지만 좌절되거나 채워지지 못했던 욕구나 바람들이 많다면, 그 부분들이 더욱 실망스럽게 느껴지고 부모의 인간적 단점 등은 더 부각되어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을 통해 사연자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학업적인 기준과 야망이 높으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와 유사하게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나 이상도 꽤 높은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사연자님께서 부모님께 바랐던 진지한 조언이라든지 따뜻한 위로를 받지 못하셨고, 그로 인해 몹시 속상하고 또 부모님께 큰 서운함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자주 사연자님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장난을 걸어 오거나, 본인 기분에 따라 욱하기도 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좀 컸다는 이유로 사연자님께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 등이 쌓여 있는데, 고등학교 진학 과정에서 부모님께 느낀 서운함과 실망감이 사연자님께서 마음의 문을 닫기로 결심하는 데 도화선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연자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 이해가 갑니다.

심리학에는 어린아이의 심리적 발달과 인간관계의 발달을 설명하는 ‘대상관계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갓 태어난 아기의 경우, 자신이 엄마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시각이 많이 발달하게 된 6개월 후부터 자신과 떨어져 있는 다른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점차 성장하면서 엄마와 심리적으로도 조금씩 분리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위험한 상황을 접하거나 좌절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 심리적으로 엄마를 찾는 시기가 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자신과 엄마가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안전한 기지인 엄마의 품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유 영역은 지키면서 여전히 엄마와 따뜻하게 연결되고, 원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연자님께서 부모님께 바라는, 부모님과 관계 맺고 싶은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입시 과정에서 사연자님께서 부모님께 원하셨던 따뜻한 위로나 지지와 관심 등이 채워지지 못하고 좌절되자, 그동안 부모님께서 사연자님께 보여 주었던 호의와 관심, 사랑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마치 ‘연기’처럼 부정하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나와 타자, 즉 나와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를 ‘좋음(good)’과 ‘나쁨(bad)’의 극단으로 나눠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설령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녀일지라도 항상 내가 바라는 나의 욕구를 전부 다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좋음’의 상태로만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때만 상대를 ‘좋음’으로 평가해서는 상대를 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으며, 그런 대상과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도 어렵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는 나쁜 점과 좋은 점, 성숙한 면과 미성숙한 면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비록 상대에게 나쁜 점이나 미성숙한 면이 존재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 고유한 인격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상대를 인정하며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지각하며, 분열이 아닌 통합적으로 경험하며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사연자님께 현재 부모님에 대해 겪고 있는 혼란스러운 감정은 아마도 사연자님의 사고와 정서 역시 상당 부분 분리되어 있는 측면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라면, 언제나 나에게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 되어 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당위적 생각과 감정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했던 강렬한 마음 사이에서 마음속 혼란과 불쾌감을 서둘러 잠재우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부모님을 ‘나쁨(bad)’으로 규정하고, 심리적으로 철수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 좀 더 세심하게 사연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필요한 조언과 위로를 건네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으시겠지만, 어딘가 부족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부모님의 행동 이면에는 사연자님께 미처 닿지 못했던 사연자님에 대한 걱정과 대견함, 애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기대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부담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무심한 척 굴기도 하니까요.

 

또 어른들도 건강하게 상호작용해 본 경험이 많이 없거나 마음과 달리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서툰 분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개중에는 성인이지만 정말 인격적으로 많이 미성숙하거나 자식을 마치 소유물인 양 잘못된 인식을 가진 부모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연상으로 볼 때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평범하지만 표현이 조금 미숙하고 사연자님께서 원하는 상호작용 방식을 잘 모르셔서 서로 간에 오해가 쌓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 간에 표현 방식이 다르고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가지 않을 때는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이는 아무리 친밀한 관계는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합니다. 

그러니 비록 부모님의 표현 방식이나 언행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부모님을 부정하고 소통을 단절하려 하기보다 사연자님께서 원하시는 소통 방식에 대해 명확히 말씀 드리면서 건강한 대화 방식을 먼저 시도해 보신다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건강한 소통 방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의 욕구와 바람을 명확히 알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비록 상대가 나의 요구를 거절해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기, 서로 원하는 것이 상반될 때 타협할 줄 아는 것, 상대방의 행동 중 나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기, 싫으면 싫다고 거절하기, 고마운 것은 고맙다고, 속상하다면 속상하다고,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표현하기 등등. 

어떠신가요? 이렇게 건강한 소통 방식을 사연자님께서 먼저 시도해 볼 때 사연자님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부모님과의 사이에서 쌓였던 오해도 점차 풀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모든 게 완벽한 존재란 없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따뜻한 말들을 건네는 부모님들조차 그러한 면은 일면일 뿐, 그들도 나름의 장점과 결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분들일 테고요.

또 만족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열심히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고, 또 자녀 분들을 위해 애쓰며 살아오신 부분도 있음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부모님께 서운한 부분이나 사연자님을 대할 때 고쳐 주셨으면 하는 부분 등을 잘 이야기해 보신다면 지금 느끼는 자기 파괴적인 느낌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누구든 부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부족한 부분이 유독 크게 보일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자연스럽고 성장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거나 자기 비하의 굴레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도 분명 좋은 점과 감사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대화로써 관계를 잘 풀어 나가시면서 부모님을 좀 더 입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바라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