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자꾸만 습관적으로 웃어넘기려 해요

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자꾸만 어떤 상황이든 일단 웃어넘기려고 하는 습관 때문에 고민입니다. 제가 인터넷상에 있는 방어기제 검사를 해 본 적이 있어요.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유머’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방어기제는 긍정적인 편에 속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저는 이런 습관이 너무 불편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불쾌한 말을 했을 때 그 말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제 입이 먼저 웃고 있어요. 그렇다고 정말 웃어넘긴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그 말에 대해 다시금 떠오르며 기분이 확 나빠지거든요. 그때는 이미 제가 웃어넘긴지라 이에 대해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상대가 분명 불쾌할 만한 말을 했는데도 제가 먼저 농담을 하거나 화제를 전환하면서 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해요. 예를 들면, 상대가 너무 살이 쪘다고 지적하면 “예쁜 건 크게 봐야 된댔어요.” 하는 식입니다. 저러고 집에 돌아가면 거울 속 제 모습에 신경 쓰이고, 그 말을 자꾸 곱씹으면서 상처받아요.

게다가 저에게 심각한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대해 자꾸만 농담을 해댄다는 겁니다. 저는 어릴 적 아버지가 폭력적이셨어요. 걸핏하면 화를 내고 물건을 부수는 등의 행동을 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잘못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저 아버지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던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최근에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인연을 끊으려는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이에 대해 답답하고 누구한테 토로하고 싶은데, 중요한 건 이때도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셀프 고아가 될 것 같다.”느니, “이 정도 고난이면 로/또 될 것 같다.”느니 농담을 합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잠깐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동안 반응에 대해 고민해 보기라도 할 텐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니 통제하기가 어렵고, 남들은 제가 쉽게 받아주니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남들이 불쾌한 말을 했을 때, “No!”를 외칠 수 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일상에서 불편한 상황에 처했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조차 유감 표시를 한다든지, 자신을 변호한다든지, 적절하게 불쾌감을 표현하기보다 농담이나 유머의 형식으로 의사 표현을 하거나 상황을 무마하려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 유머나 농담으로 난처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속히 무마하려는 시도가 가끔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우 빈번하게 방어기제로 사용하시는 듯합니다. 유머라는 방어기제는 다른 방어기제들, 예를 들면 행동화나 퇴행, 왜곡과 같은 미성숙한 방어기제에 비해 승화나 이타적 행위와 같이 성숙한 방어기제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란, 두렵거나 불쾌한 정황, 욕구 불만 등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취하는 적응 행위를 말한다. 우리 마음은 불안, 수치심, 죄책감이 나타나는 기척이 들리면 얼른 방어기제를 출동시킵니다. 

성격이나 인격이 한 사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고, 이것으로부터 생각, 태도 혹은 행동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했을 때, 그러한 특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꽤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방어기제입니다.

같은 수모를 당하고도 어떤 사람은 화를 비교적 잘 참는데 다른 이는 불같이 날뛴다면, 이 두 사람의 방어기제는 서로 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잠시 숨을 고르고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받은 수모의 몇 배를 상대에게 돌려줄 수도 있는 것이죠. 

 

유머를 비교적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보는 이유는, 이처럼 불쾌하고 공격적인 충동이 생겼을 때 상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된 형식으로 자신의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어느 정도 표현하면서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는 유머에 대해 “최고의 방어기제”, “멋지고 고무적인 것”이라며, 이 방어기제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요. 

우리가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자아가 내외적인 요구 사항을 적당히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 적절히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여 정신적인 균형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방어기제가 적절히 작동되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특히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익숙하게 사용하던 방어기제로 내외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정신 내적인 고통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주 쓰는 방어기제가 무엇인지, 혹시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두 가지 방어기제를 너무 즐겨 쓴다거나 그것의 사용이 과도하다 보면, 내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마음을 잘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따라서 내 행동이나 태도, 성격에 묻어나오는 방어기제를 잘 살펴봐야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어기제를 분석하는 데는 망설임과 저항이 뒤따릅니다. 방어기제가 마음의 고통을 예방하고 나를 지키는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죠.

 

사연자님께서 그동안 유머라는 주된 방어기제를 사용해 오신 것을 보면, 내공이 약한 분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 불쾌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구사하는 분들은 주변에서도 ‘유쾌하다’거나 ‘재치 있다’는 좋은 평판이 형성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상황에서도 꽤 유용한 방어기제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사연에 적어 주신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농담으로 그 상황은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사연자님의 마음속에는 상대의 공격이나 지적으로 인한 상처가 남는다든지, 그 상황을 자꾸만 곱씹어 보는 등 찝찝함이 가시지 않고 있네요. 더구나 사연자님께 심각한 일이 발생했을 때조차 자조 섞인 농담을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인식하고 수용하기보다 불편한 상황이나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사연자님께 정말 큰 실수를 하거나 불쾌한 이야기를 해서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때조차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친다면, 자칫 사람들에게 사연자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나 오해가 쌓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가령, ‘저 사람은 이렇게 말해도 상처받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저 애한테는 이 정도 장난은 쳐도 상관없겠지.’ 하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이죠. 이것은 상대방이 사연자님께서 받은 상처나 속마음을 잘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연자님도 앞으로는 불쾌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솔직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시는 연습을 조금씩 해 나가셨으면 합니다.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도 남지 않고, 사람들이 사연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경계를 명확히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연에 적어 주신 것을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폭력적인 성향을 자주 보이셨고, 그로 인해 평소에도 불안감과 긴장감 수준이 높다거나 혹은 작은 갈등 상황에서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라도 하면, 혹시 상대방이 화를 내지 않을지 위축되는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농담으로 빨리 분위기를 풀어서 긴장된 상태를 벗어나고 싶으신 것 같고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사연자님께서는 나약한 어린아이가 아니세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눈치를 너무 살피기보다 사연자님의 생각과 감정에 좀 더 집중하시고, 솔직한 자기표현을 해 나가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보통 솔직한 자기표현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여기에 위험이 따른다거나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어떤 불이익을 당할 것이고 예상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솔직함이 위험을 가져오는 것도, 꼭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상대의 입장이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은 거친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무례한 것에 가까운 것이죠. 이를테면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대놓고 살쪘다고 지적한 것은 좋은 솔직함이라기보다 무례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에 반해 부드러운 솔직함이란, 상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마음이나 상황에 초점을 맞춰서 표현하는 솔직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입장이나 기분도 고려해서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될지에 대한 숙고가 있기에, 상대방도 크게 기분이 상하지 않고 비교적 잘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누군가가 나에게 살쪘다고 무례하게 지적해 왔을 때, 비록 나도 상대방과 똑같이 그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겠지만, 자칫 관계가 틀어지거나 진흙탕 싸움이 될 수도 있기에 당신의 표현에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찌긴 했는데, 직접적으로 들으니 좀 당황스럽고 민망하네요.”라고 절제되면서도 부드럽지만, 정확하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죠. 

생각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부드러운 솔직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불편한 상황에서는 서로를 비아냥대거나 회피하거나 농담으로 빠르게 종결시키려는 시도 또한 빈번하지요. 그러나 그런 소통 방식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후회나 수치심, 자기비하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계속해서 쌓일 수 있으니, 솔직한 자기표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의사소통 기술입니다. 

 

평소 농담이라는 방어기제를 주되게 사용해 오신 사연자님인 만큼 갑자기 솔직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한번 거울을 보고 연습해 보세요. 과거에 불쾌했던 상황이나 장면들을 떠올려 보며 그때 이렇게 이야기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부드러운 솔직한 표현 방식을 생각해 보고 직접 말해 보는 연습을 해 보는 겁니다. 처음에는 거울을 보고, 그다음에는 친근한 사람들에게, 나중에는 친분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도 이렇게 부드러운 솔직함을 표현해 나가는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 방식으로 해 나가시기를 권유드립니다.

마찬가지로 불쾌하거나 문제가 발생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대응하면 좋을지 노트에 차근차근 정리해 가며 생각도 함께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례하게 굴거나 불쾌한 말을 했을 때, 즉시 반응하지 마시고 마음속으로 정지 버튼(stop)을 누르고 숫자를 다섯까지 세어 보세요. 또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잠시 호흡과 생각을 다듬어 보는 거죠. 거칠게 반응하거나 농담으로 기분 나쁜 상황을 무마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고, 솔직한 마음을 부드럽게 표현할 만한 적당한 말을 고르는 시간을 잠시 가지시는 겁니다. 

이렇게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자기표현을 한다면, 사연자님께서 걱정하시는 갈등 상황이나 불이익을 당하거나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휘둘리거나 자조 섞인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 자기 확신과 자존감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리고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사연자님께서 지닌 특별한 능력이자 장점이기도 한 만큼 적절한 상황에서 가끔 유머를 사용한다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연자님이 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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