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신발 속 모래 한 알

정신의학신문 | 이도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리도 멀었던 걸까요. 하루 종일 견뎌 온 모진 말, 차가운 시선이 양 어깨를 누르는 듯 무겁기만 합니다. 이런 날은 잠에 들기까지 머릿속이 얼얼하게 화를 냈다가,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내일이 오지 않길 바라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상처를 받습니다. 무수한 상처에 무뎌질 법도 하지만 일부는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두고두고 괴롭히게 되죠. 트라우마란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일 정도인 것들이 나에게는 트라우마로 남기도 합니다. 

직장 상사가 질책과 격려를 섞어 하는 모진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일진이 사나운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오히려 그 상사를 떠올리며,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나?’ 하며 걱정을 해 주기도 할 수 있죠.

하지만 과거 학교 폭력이나 직장 내 가혹 행위 같은 일을 경험했던 사람에게는 폭력의 전조 혹은 연장선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사람의 머리속에는 과거의 폭력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어, 마치 현재 그 상황 속에 있는 듯한 불안 혹은 공포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과거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조그만한 자극에도 쉽게 동요되기 마련입니다. 마치 신발 속 모래 한 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그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다 결국 주저앉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 신발 안으로 들어온 모래, 그걸 참아내지 못한 내 자신, 그 누구를 탓할 순 없을 것입니다. 대신 대부분 후회를 하죠. ‘모래가 느껴질 때 애초에 털어내 버릴걸.’ 하면서요. 

 

 

트라우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라우마를 받은 내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우연히 내 인생으로 들어온 트라우마 자체도 문제가 아닙니다. 털어낼 수 있는 이 트라우마를 숨기고, 감추고, 심지어 꼭 붙잡고 있는 그 행동이 문제인 거죠. 그렇기에 내가 특정 상황에서 유독 힘들고 현재와 관련 없는 과거의 일들이 함께 떠오른다면, 지금 내 마음속에 작은 트라우마가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바라봐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보면, 이 상처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보이기 마련입니다. 시작과 그 연결점이 보이면 반대로 끊어내는 것도 가능해지죠. 이렇게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현재를 지키고 더 평온한 미래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소중히 간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바쁜 걸음을 잠깐 멈춰 모래를 털어 내고, 더 편히 걸어 나가셨으면 합니다.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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